무등산 落葉(낙엽)이 들려주는 가을 이야기
얼마 전 광주광역시에 있는 모교 60주년 행사를 다녀오던 길에 잠시 무등산 기도원을 들렀다. 무등산은 내 생이 마감되는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내 초심(初心)의 발원이요, 영혼의 노스탤지어가 깃든 곳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나 생전 처음으로 광주로 가서 신학교를 다닐 때였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서럽고 배고픈 고학을 해야 했다. 건축 현장에 가서 노가다 질통을 짊어지고 일했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수박장사, 오이장사도 하였다.
그러다가 울적한 마음이 생기면 무등산 기도원으로 올라갔다. 당시 무등산 기도원은 배는 고프지만 소명감이 충만한 신학생들이 주로 올라가던 곳이었다. 그래서 나도 선배들을 따라 그곳으로 올라갔다. 한 번 올라간 무등산 기도원은 이후로 내 기도의 전당이요, 영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곳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밤을 지새우며 눈물의 기도를 쏟고 또 쏟았다. 거기서 하나님께 다짐하고 서원했다. 훗날 아무리 큰 교회 목회자가 되어도 지금의 가난한 신학생 시절을 잊지 않고 끝까지 영혼을 사랑하는 초심을 빼앗기지 않겠노라고. 그러고는 막대기를 손에 잡고 마이크라고 생각하며 빽빽한 나무들을 나의 교인이라고 상상하면서 설교 연습을 했다. 이처럼 그곳은 내게 위로와 꿈의 스토리를 담아준 곳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서 서울로 올라왔고, 맨주먹으로 23평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은 광주에 한 번도 못 가 볼 정도로 개척 목회에 전념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야 다시 무등산을 찾기 시작했다. 광주를 내려가면 항상 그곳을 들렀다. 올챙이 신학생 시절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한번은 오랜만에 무등산을 찾았더니 공원이 새롭게 개발되어 겉모습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서먹서먹하게 느껴졌다. 산길도 계곡도 옛날 같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던 기도원에 이르렀을 때 내 가난한 젊은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무등산 기도원은 여전히 나를 맞이해서 격려해주고 있는데 오히려 나 자신의 모습이 더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 무등산을 찾았을 때도 붉은 단풍잎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듯했다. 혼탁했던 머리가 깨끗해지고 무거웠던 어깨도 가볍기만 했다. "아, 이곳에서 며칠만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저 가을 산의 계곡과 아름다운 단풍잎들, 상쾌한 공기와 물이여."
나는 가을이면 무등산을 찾아 낙엽들과 대화를 한다. 여름의 무등산 숲은 억새들이 제멋대로 자라 그들만의 장엄한 숲을 이룬 곳도 있다. 그러나 그 숲도 가을이 되면 낙엽처럼 흔들리고 땅에 쓰러지고 만다. 사람들은 그 붉게 물든 단풍의 절경과 쓰러져가는 억새들의 장관을 보기 위해 무등산을 찾는 듯하다. 그리고 무심코 낙엽을 즈려밟고 간다. 하지만 무등산 나뭇잎과 낙엽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떨어지는 낙엽도 함부로 밟지 마세요. 이래 봬도 정열적인 삶을 불태우다가 장엄하게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나뭇잎들은 가을이 되어 떨어지고 있지만 그들 역시 봄의 꿈과 여름의 정열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봄의 꿈을 꾸면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땅에 떨어져 흙으로 사라지지만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내년엔 더 푸른 싹으로 피어날 꿈을 꾸면서.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아낌없이 썩어 새로운 잎으로 피어나기 위한 희생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낙엽조차 함부로 밟지 않는 심정으로 가을 산길을 걸어 기도원에 다다랐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기도했던 그 바위에서 잠시 눈물을 훔쳤다. 이 무등산 기도원이 있었기에 한 번밖에 없는 나의 젊음을 불태웠고 지금껏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지 않았던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곳이야말로 내겐 에덴과 같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요즘 와서는 무등산을 찾을 겨를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광주를 와도 매번 들를 수가 없다. 이번에도 무등산 기도원에서 충분히 기도도 하고 옛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오늘의 나를 성찰하고 내일의 나를 바라볼 시간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쩐지 무등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는 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만지고 싶고 봉우리를 품고 싶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 속에서 밀려나는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붉은 단풍과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이렇게 속삭였다. "나를 잊지 마세요. 젊은 시절 꿈을 불태웠던 가난한 신학도의 초상(肖像)을 잃지 마세요. 그대의 외롭고 허기진 밤을 들뜬 사랑으로 붉게 물들였던 예수의 핏빛 첫사랑도요." 순간 너무 부끄러웠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아, 내가 언제부턴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순수했던 청년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지는 않은가. 저 떨어지는 무등산의 낙엽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나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밀어(蜜語)를 들으며 깨달았다. 무등산의 가을 낙엽들이 흙길이 아니라 내 가슴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