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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신문 논단] 명품은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다
        • eyJjdCI6IldPSVwvSllzQlZjNUllY3VFWVpQc1pnVFdWeVZoRHJaUngrd0hYb0Nrd1B3PSIsIml2IjoiOGZiMDQxZTdhNzIxMTNmZTkyM2U1NTliOWY4Mzg0MjMiLCJzIjoiMTk2ZWVkOWQ3ZTJjNTBmMyJ9| 등록일 : 2013.04.01 |조회수 : 843 |추천 : 35
        • [논단] 명품은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다  
            
          <1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는 책이 있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 때 평범한 질그릇을 만들 때는 가마의 온도가 일반적으로 800℃ 내외라고 한다. 하지만 최고가를 자랑하는 고려청자, 이조백자 같은 작품을 만들 때 최적의 온도는 1250℃라는 것이다. 그렇게 뜨거워지면 흙의 밀도는 놀라울 만큼 강하고 단단해진다. 마침내 빛을 띠고 유리처럼 매끈매끈한 청자나 백자가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고려청자, 이조백자와 같은 명품 도자기로 빚어지기 위해서는 가마 속 1250℃ 불길과 같은 고난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고난의 뜨거운 온도를 싫어하고 인내하지 못한 채 800℃의 편안한 환경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 고난이 닥치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왜 나만 이런 고난을 겪느냐고 원망하며 푸념한다. 그러나 명품 도자기가 그렇듯이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위기 능력을 갖게 되고 삶이 변화되며 신앙이 성숙하게 된다. 1250℃가 뜨겁고 힘겨운 고난인 것 같지만, 그 고난을 참고 견디며 빚어지는 삶을 살 때 명품 도자기처럼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즐겨할 필요가 있다. 고난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난 속에서 명품 인생으로 빚어지기 위해 인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로는 고난을 기꺼이 환영하며 그 고난 속에서 신앙의 경건과 성숙을 일구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고통스러운 신비다. 아니, 고난 속에는 심오한 영적 섭리와 비밀이 있다. 그래서 초대 교인들은 고난을 영광으로 여기고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여긴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사도 바울, 로마의 카타콤베와 갑바도기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교부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레니우스나 폴리갑, 이그나티우스 같은 교부들도 스스로를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며 주님 앞에서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칼빈도 경건을 즐거움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경건은 고난과 결부된 경건이었다. 이처럼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은 고난을 오히려 삶의 위대한 영광이요,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고난 속에는 깊고 깊은 영적인 비밀이 있다.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을 이루셨다. 시편기자도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했다(시119:71). 그러므로 고난은 영광의 길이다.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와 연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에 동참하게 하고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같은 명품 인생으로 빚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사방을 봐도 고난이다. 특별히 우리 교단은 더더욱 그렇다. 여기저기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고 고난의 불이 타오른다. 곳곳에서 뜨거운 화상을 입고 상처 받으며 신음한다. 이런 고난의 현실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오는 것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세상 앞에 더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잘못 때문에 오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를 명품 신앙으로 만들고, 우리 교단을 명품 교단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고난주간을 맞는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고난주간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한다. 언제부턴가 고난주간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관례적인 행사로 보낸다. 그래서 고난주간의 의미가 실종되고 퇴색했다. 고난을 멀리하다 보니 고난의 의미를 모른다. 더구나 고난주간이 와도 고난주간의 신비로운 영적 의미와 뜻을 생각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평소에는 고난을 잘 묵상하지 못했더라도 고난주간만큼은 고난의 의미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먼저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 참 고난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1250℃의 그 뜨거운 고난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일지라도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볼품없는 질그릇이 아닌 고려청자, 이조백자와 같은 명품 인생, 명품 교단으로 빚음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도공이다. 지금도 고난의 불길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빚으시고 합동교단이라는 도자기를 굽는다.

          고난주간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참 고난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 고난의 영적 신비를 묵상하고 깨닫는 것이 진정한 고난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명품 인생으로 바꾸고, 교단을 명품교단으로 만들기 위하여 함께 힘을 모아보자.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 위해서 당하신 그 처절한 핏빛 고난의 고통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한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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