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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신문 논단] 생명언어 문화를 정착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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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생명언어 문화를 정착시키자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인간의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만의 수단이라면 동물들의 의사소통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는 의사소통뿐 만 아니라 존재와 사상과 정신까지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사용하는 언어를 통하여 존재와 사상의 집을 짓는다. 또한 독일의 뇌학자 로렌치 박사는 언어에는 각인력, 견인력, 성취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들이 삶에 깊이 각인되고 삶을 이끄는 견인적인 역할을 하며 마침내 언어가 이루어지는 성취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언어로 소통하기를 원하셨다.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하나님과의 완벽한 생명 언어로 소통의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죄악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으며, 언어도 생명 언어에서 사망 언어로 변질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악과를 따 먹은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 언어도 왜곡, 변질되고 파괴되는 것을 볼 수 있다.(창3:8, 3:3)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뿐 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공격적 언어폭력으로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언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 16세기 문예부흥 운동에서부터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중심은 인간의 이성이었다. 특별히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프랑스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하면서 존재 보다 생각이 앞선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었는데 생각이 자기 존재보다 앞설 뿐만 아니라 신보다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언어는 선악 판단 개념이 더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때 까지만 해도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상식은 통했다. 아무리 선악판단이 만연했다 하더라도 이성적으로 설명해서 납득이 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수용하고 인정하던 때였다. 설령 자신의 뜻과 맞지는 않거나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수긍을 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구조주의로 오면서 언어의 ‘동일시 현상’이 나타났다. 어떤 물건에는 각각의 개성이 있고 나름의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하나로 동일시를 해버린 것이다. 예컨대 ‘책상’하면 수많은 종류의 책상이 있지만 학교에 있는 책상의 이미지나 의미로 동일 시켜버렸다. 

          그러다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는 동일시를 넘어서 차이를 강조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고 사물도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름과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느낌이었다. 그래서 몇 십 년 전만 해도 비록 나와 맞지 않더라도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고 설명이 되면 이해를 하거나 인정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다름과 차이를 나쁜 걸로 생각하려고 하고 그것을 전부 감성과 느낌으로 판단을 해 버린다. 다시 말하면 선악간의 판단을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해 버린다. 그래서 오늘날은 언어에 심한 감정을 담아 전달을 하는 수많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언어들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현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SNS나 인터넷 댓글과 같은 익명의 폭력적인 언어들이다. 어느 한 사람이 잘못을 하면 우르르 몰려들어 언어적 폭력을 휘두른다. 특별히 스타급에 해당하는 지도자가 실수를 하면 더 그렇다. 온 기관과 군중이 서로 동일한 집단이 되어 무서운 언어폭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연예인, 정치인, 각계의 지도자들을 잃었는가.

          그런데 이런 감정을 실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언어문화가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버렸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는 간교한 여우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성도들끼리 서로를 헐뜯는 폭력 언어로 인해 치명타를 받고 있다. 이런 공격적 언어폭력이 더 확대되면 교회와 지도자의 수치를 언론에 제보하여 드러내거나, 혹은 법정에 고소, 고발까지 하여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그러다 보니까 현대인의 감성에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땅바닥까지 실추하고 부정적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국교회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 언어를 몰아내고 새로운 생명 언어의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특히 우리 교단에 상대방을 죽이고 쓰러트리는 살인 언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공격하고 조그마한 사실을 과장되게 부풀려서 군중 심리를 유발시키며 언어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사망 언어, 살인 언어다.

          그러나 생명 언어는 말 그대로 언어 속에 생명을 담고 있는 말이다. 생명 언어는 사람을 치유하고 희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언어다.(잠10:11, 잠15:4) 의인은 생명을 살리는 언어를 말하고 악인은 생명을 죽이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제 우리 교단이 먼저 생명 언어 문화를 정착시키자. 서로를 공격하고 죽이는 살인 언어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생명 언어를 쓰자. 그럴 때 선악 판단 중심의 언어로 인하여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생명 중심의 언어로 하나 되고 연합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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