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갑바도기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숨었던 장소인데 비잔티움 시대까지 수도원으로 쓰였다. 교회는 타락해 갔지만 수도원은 그 시대의 정신과 사상의 등불이 되었다. 단체 여행이 아니었기에 폐허가 된 동굴까지 드나들면서 어둠과 고독을 벗 삼아 신앙의 순결을 지켰던 이들의 체취를 느꼈다. 바람이 빚어놓은 기암절벽(奇岩絶壁) 사이로 물드는 붉은 석양…. 아,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그루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어 침묵과 고독 속에서 밤을 맞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삶에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삶을 나누어왔다. 그런데도 이따금씩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적막한 수도원에 가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인간은 근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성경에 의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존재의 근원과 원형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산(山)을 동경할 때가 많다. 시를 쓰는 내게 산은 원형의 모형이고, 근원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질만능과 경쟁사회에 매몰되어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사는 것일까 자문하며 황폐한 자신의 내면세계를 발견한다. 그 순간 꽃향기를 맡을 수 있고 새소리를 들으며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는 초야(草野)의 삶을 그리워한다.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되어 홀로 움막을 짓고 살더라도 원형의 삶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독일 가톨릭 신학자 한스큉의 예견대로 현대인은 제도에 찌든 교회에는 거부감을 갖지만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과 영성(靈性)의 욕구는 더욱 강렬해져 영혼의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것을 본다.
목회를 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과 발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함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내면세계가 메마른 사막 같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힘들게 개척해서 이룬 교회를 은퇴하고 당장 시골로 낙향해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삶을 살고 싶어진다. 아니, 깊은 산 계곡에 홀로 움막을 지어놓고 산과 물과 하나 되어 살고 싶기도 하다. 그것이 좀 더 근원의 삶과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 나마저 산이나 광야로 도피하고 은둔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산이나 광야로 가 버린다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오히려 세상이 텅 빈 광야나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현실 도피의 관념적인 피안(彼岸)의 세계를 동경할 것이 아니라 절박한 생(生)의 한가운데서 실천적 영성의 꽃을 피워야 한다. 우리의 삶과 밀착된 생활형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얼마 전 박인주 전 청와대 사회통합수석이 대표로 있는 '생명문화운동'을 후원하고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는 신부님과 스님들도 참여했는데 오히려 그분들이 출산 장려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스님이 출산 장려 운동을 하시고 신부님이 다산(多産)을 하자고 하면 말이 됩니까? 그러면 신부님이나 스님도 장가를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순간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나는 매일매일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내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교인들은 "목사님, 좀 쉬면서 하세요. 건강 좀 돌보세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심방을 와달라고 간청한다. 얼마 전 어느 교인이 자기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는데 목사님이 꼭 오셔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해외에서 막 도착하였기에 몸이 파김치가 되어 천근만근이었지만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생각해서 힘들게 갔다. 그 어머니는 딸의 집을 방문할 때 가끔 우리 교회도 나오신 분인데 치매 상태여서 나를 몰라보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하고 기도를 하자 그분의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를 알아보고 이름까지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정말 흐뭇한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무거운 몸을 끌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슬픔에 빠져 있는 유족들의 손을 붙잡고 간절한 위로와 소망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이 큰 위안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따뜻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는 또 저녁 집회를 인도해야 했다. 이렇게 교인을 만나고 소통하며 삶을 나누는 것이 나의 기쁨과 행복이다. 내가 산속이나 광야로 은둔해 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따뜻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삶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가 땀과 눈물을 쏟으며 영혼의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때론 세상이 악취를 풍겨 우리를 역겹게 할지라도 그곳에 사랑과 행복의 꽃씨를 뿌려야 한다. 그 꽃씨는 훗날 꽃들의 향기로 악취를 몰아내 줄 것이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꿈이 있고 노래가 있을 것이 아닌가.